본문으로 바로가기

인생 여행 6편 - "삶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은 왜 사는가. 그리고 인생의 가치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다.


 

비가온다.


생각보다 많은 비가 온다.


서울은 비가 오는지 모르겠네?

벌써 여기 대전의 현지인이 다 된 것 같다.


원래는 어제 서울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차에서 잠들어버렸다.


아... 너무 좋다.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생활한다는 것 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대전에서 살고 싶다.

참 좋은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여행을 오면, 멋진 관광지를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그냥 걷는다.

자전거 한대를 차에 실고 그냥 자전거를 타면서 생각하거나,

그냥 걸으면서 생각한다.


하루 종일 생각한다.


그냥 생각에 생각을 한다.


비가 오는 길은 참으로 좋다.

서울에서 비가 오는 것은 짜증스러운 일이지만, 이곳처럼 탁 트인 공간에서 비를 맞는 다는 것은 꽤나 낭만적이다.


(대전의 가로수 길들은 참 보기 좋게 만들어져 있다. 비오는 날 이 가로수길을 걷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사람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관리가 잘 되고 있는지도 모르지...)


비가 오면 좋은 이유는, 비가 오면, 절대적으로 나 혼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우산을 쓰고, 어디엔가 숨어 있는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는 매우 좋은 환경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결국 인생의 이유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가 포기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의 이유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으려고 하거나, 또는 그냥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의미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러한 생각의 결론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을 찾아낼 방법은 지금 당장 없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들은 오늘도,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다.

저렇게 사는 것이 최선이다.

그냥 이렇게 결론 짓고 살아버린다.


내가 살아아야 할 이유, 그리고 그 정확한 근거를 알게 되는 지식보다, 이 세상에서 더 큰 가치의 지식이 있을까?


사람들은, 모든 이 세상의 과학, 그안에서 밝혀진 원리들을 보며 인간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결론을 내리려고 노력한다.


화성 탐사도 하고, 달 착륙도 하고, 우주를 천체망원경으로 보면서 연구하고.

어찌보면 지금의 인생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이상한 짓을 하고 있지만,

왜 사람은 그러한 이상한 짓을 하고 있을까?


실패할 가능성도 높은데.

그리고 후손들도, 그 후손의 후손들도 그 원인을 밝혀 내기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이런 무모한 도전으로 그 근거를 찾으려 노력하는것일까.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삶의 이유, 인간의 기원을 찾으려고 하는 그 노력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인생을 걸만큼 중요하다고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인생의 이유에 대해서 그 관련 지식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제는 수 많은 시간이 지나가도 그 원인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찾는 과정 자체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


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주입한다. 그러한 행동자체가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인간의 삶에서, 인생의 의미라는 지식보다 더 우선하는 지식은 없다.

왜 사랑을 해야하고, 왜 자녀를 낳고 종족을 번식시켜야 하며,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마지막 최종 질문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다. 결국 이 최종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나머지 질문들에 대한 답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 하기 시작한다.

최종질문에 답을 하지 못해도 좋다. 나머지 파생된 질문들에 답을 하려고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삶은, 그러한 인생의 이유를 찾는 것 자체,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목적인 것인가?


삶의 이유를 찾는 과정.

그냥 그 과정자체가 우리의 인생의 의미이며 목적이 되느냐 이 말이다.


사람들은 물리적인 존재이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물리라고 칭하는 원리이 기반하여 존재가 입증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육체는 물리적인 것이며, 물리적인 것 중에 영원한 것은 없다.


또한 물리적인 것들은 그 모든 능력치에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태양의 빛이 무한대로 뻗어나갈 수 없으며, 인간의 뇌가 무한대의 수식을 연산해낼 수 없다.

모든 것은 한계가 존재할 뿐이다.

 

 

사람들은 그 한계적인 특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분석하려고 한다.

때로는 자신들의 능력이 무한대라고 자기 암시를 주면서 까지 말이다.


인간의 능력이 무한대라면, 지금 바로 소말리아 라는 나라에서 죽어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1초만에 날라가서 자원봉사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언젠가는 말이다.

그 희망을 가지고 과학을 연구하고, 그 희망을 가지고 사람들은 그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자신의 인생은,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의미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 가지 착각하는 것이 있다.


아주 중요한 착각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발견하고, 인간이 연구하고 있는 이 우주의 원리는, 원리의 이유를 입증하는 과정이라기 보다는, 현상에 대한 데이터 통계를 내고 있다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는 것은 H2 와 O가 합해지면 H2O 가 된다는 것이다. 수소와 산소가 합해지면 물이 된다. 그래서 이 원리를 이용해서 다른 곳에 활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원리라는 것은, 결국 H2와 O가 만난 결과물에 불과하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원리는 무엇이냐면 "왜?" 라는 질문이다.


왜 H2 와 O가 만나면 H2O가 되느냐 라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자는 아마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 안에 미세 원소기호가 있을 수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원소기호는 이정도이지만, 그 안에 더욱 세부적인 원소기호가 있어서, 그 원소기호들의 화학반응으로 이렇게 H2O가 되는 것이다."


라고 설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안의 미세원소기호 조차 아직 발견을 못했다는 것인데, 그것을 발견했다고 치고, 그 다음에 또 질문을 하면, 


"그 안에 초미세 원소기호가 또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할 것이며, 또 시간이 지나서 초미세 원소기호가 발견이 되면


"그 안에 초초미세 원소기호가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원초적인 질문에 답을 하기보다는 그 답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그 핑계를 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결국에는 최종적으로 모든 원소기호를 발견한 뒤에 


"왜 이렇게 융합되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그 질문에 결국 답해야 할 시기가 온다는 것이다.


그 때 역시 "또 초초초초초초초초초촟초초초초초 미세 원소기호가 있을 것이다." 라고 답할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계속 미루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미루기로 한다면, 유한한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 그 이유를 밝혀낼 수 없을 것이다.


지속적인 과학개발, 과학개발의 끝은 없다.

왜냐하면, 과학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돌아가는 역학적, 물리적인 원리를 이용하는 것인데, 그 원리의 끝이 어디인지 결국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끝이 존재한다는 것 조차 알 수 없다면, 사람들은 여기정도 까지가 끝일 것이다라고 짐작할 수 있지, 그 짐작이 맞는지 틀리는지 입증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일까?


그것은 애초부터 과학으로 인간의 원리, 인간의 탄생, 인간의 미래, 인생의 이유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우주의 크기는 측정할 수 없으며, 그것을 측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우주의 끝이라고 입증할 수가 없다.

즉, 질문의 질문을 더 해봐야, 답안지 조차 존재하지 않는 질문에 대해서 문제를 푸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설령, 그 답을 맞췄다 한들, 그 답을 풀어낸 사람이, 그 것이 답인지 아닌지 조차 알지 못한다면, 그 답은 그대로 역사속에 묻혀서 조용히 사라질 것이다.


4살짜리 아이에게 주관식으로 대학수학 시험문제를 풀게 하는데, 4살짜리 아이 수조 명, 수경명에게 시험문제를 내면, 예를 들어 무조건 모든 아이들이 틀릴 것이다라고 100% 확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그 아이들이 틀릴 가능성은 무한대의 99.99999%에 수렴한다.


그럼 단 0.000000000001 %의 확률에 도전한다고 사람들은 핑계를 대지만, 문제는 그 아이가 이것이 답인지 아닌지 조차 모르고 찍었을 가능성 역시 99.99999999999% 에 수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문제를 맞추고 틀리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애시당초에, 그 확률과, 통계로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노력 자체가 허구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과학 연구를 하다보면 이 세상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원리가 아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 보여지는 데이터 통계값일 뿐이다.


봄에 꽃이 핀다.

사람들은 따뜻한 햇빛을 맞을 수 있는 봄에 꽃이 피는 것이 당연한 진리라고 믿는다.

광합성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그 봄이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연구하고 있는


"광합성의 원리"


이다. 그리고 이 원리를 통해서 왜 꽃이 봄에 활발한 광합성으로 활짝 피는가를 입증해낸다.


사람들은 그것을 입증한 것을 보고, 계절의 원리를 깨달았다고 칭송한다.

마치 세상이 돌아가는 이유를 안다고 환상에 빠진다.


번개가 치는 것을 보고 한 과거에는 신이 노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다, 번개라는 것이 구름의 양전기와 음전기의 반응으로 전기 반응으로 인해서 발생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람들은 마치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호구라고 무시하고 조롱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지함의 극치일 뿐이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데이터값이 아니다. 즉, 자연의 현상이라는 것은 그냥 현상일 뿐이다. 보여지는 결과값, 데이터일 뿐이다. 그 데이터값을 분석해서 그 데이터가 나오게 된 이유를 찾는 것 뿐이다. 


번개라는 것이 친다는 자연현상을 보고, 그 현상의 원리를 분석하는 것 뿐이다. 그 현상의 원인이 음전기와 양전기라는 것 그것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런 데이터 값을 토대로 분석한 원인과 결과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통계에 불과하다.

이것은 단순히 수학적인 공식을 만들어내어 관련성 분석을 하는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왜 꽃은 광합성을 하는가."

"왜 음전기와 양전기가 반응을 하면 번개가 발생하도록 설정되어 졌는가"


이다. 


더 나아가서


"왜 꽃이 존재하는가."

"왜 음전기와 양전기가 존재하는가."


이다. 


왜 꽃이 광합성을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은


"꽃이니까...."


이다..


음전기와 양전기가 반응하면 왜 번개를 만드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분석해 보니까 그렇더라..."


이다.


왜 꽃이 존재하는가?

너가 만들었는가?


"그냥 있더라..."


왜 번개가 존재하는가?

너가 만들었는가?


"그냥 있더라...."


이다.

 

 

즉, 인간이 해야 할 질문은 그 수학공식이 있다면 그 수학공식을 왜 그렇게 만들었고, 그 수학공식의 인자는 누가 설정해 놓았는가 이다.


왜 꽃이 광합성을 하게 만들었는가?

인간이 광합성 하면 되지.

왜 물이 흐르게 만들었는가?

인간도 연체동물처럼 흐느적 거리게 만들면되지.


이렇나 기준을 누가 만들었느냐 이 말이다.


이것이 바로, 공식 속의 인자값을 누가 미리 정해 놓았느냐 이 말이다.


공식이 존재하는데, 그 공식속에 포함되는 인자값을 이미 누군가가 넣어놨다는 것이다.


내가 넣어둔 것도 아니고, 인류의 그 누구도 넣어둔 것은 없다.


결국 무엇이 그 인자값을 만들었는지, 그것을 찾아야 하는것이 인생의 이유, 인간의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인데, 과학이란 그것을 모두 비켜나가고 있다.

과학이라는 것은, 인류의 기원을 풀어내는 것이 아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인류의 목적을 발견해내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그냥, 이 자연의 현상과 원리르 분석하고, 그 것을 이용하려고 하는 인간의 수단일 뿐이다.


이 세상에는 무수한 변수들이 있다.

그리고 그변수들은 왜 자신들이 변수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변수란 바로 나이다.

그리고 그 변수란 바로 너이다.

이 세상에는 벌써 60억의 변수가 존재하며,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변수를 재곱하고 재곱하다면, 그 변수의 실질적은 수는 무한대로 다다른다.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분석해서 데이터화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무한의 불가능에 다다른다.


단지 어느정도 타협해서, 분석할 뿐이다.

대충 이정도, 대충 저정도.

그래. 모든것이 대충 대충이다.


인간들이 그렇게 신뢰하고 있는 각종 데이터들은 모든 것이 대충대충이다.

왜냐하면 세부적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때부터는 도저히 규칙을 정하고, 규정을 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상당히 논리적으로 살고 있는 척하고, 상당히 냉철하게 살고 있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대충 살고 있다.


대충 만들어진 규칙과, 대충 만들어진 법의 틀 안에서 그들은 오늘도 대충 살고 있다.

너도 대충 살고 있고, 나도 대충 살고 있다.


풀리지 않는 문제는 저기 구석탱이에 던져 버리고 살고 있다.


왜 사람이 낙태로 태어나자마 죽어야 하는가?

왜 사람이 착하게 살았는데 교통사고로 죽어야 하는가?


풀리지 않는 문제는 대충 집어 던져놓고 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과학을 신뢰한다.


과학이란 이 자연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물리적인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불석하는 것이다.


인간도 물리적인 주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공학이 발달되고, 유전자 연구를 통해 사람의 수명도 연장될 수도 있고, 건강도 회복할 수 도있다.


그런데 물리적 주체가 이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모른다.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질문이 틀렸기 때문이다.


누가 세팅했느냐.

누가 이 세상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해서 기본 세팅을 했느냐.

이 질문을 던지지 않고, 문제를 풀려고 하기 때문이다.


권선징악, 고진감래, 인과응보.


사람들은 역사에 길이남을 사자성어를 만들고, 후대에게 본받으라고 각종 명언을 진리라는 모습으로 포장하여 쏟아낸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인생을 조금만 살아봐도, 이러한 명언들이 맞는 경우도 있고,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왜일까?


변수가 너무 많아서 일수도 있다.

인간이 풀어내기에 그 변수가 너무 많고, 그 변수의 수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측정 도구로는 분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데이터값에 경우의 수가 발생이 되는데, 그 경우의 수가 유한하면 상관없는데, 무한대로 수렴하는데 그것을 물리적으로 분석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사람들은 일정 상황에 대해서만 케이스를 한정하게 되고, 그 케이스 범위 내에서만 분석을 한다.


말그대로 대충 대충 한다는 것이다.


또다른 이유로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 세상의 원리, 그들이 옳다고 믿는 이 세상의 정의가 이 세상에 대한 셋팅값을 설정한 존재의 의견과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인간은 위대하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 조물주라는 존재는 인간을 위대하게 세팅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때리고 폭행하는 것은 큰 죄악이라고 치부하지만, 그 조물주라는 존재는 그러던지 말던지 신경쓰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낙태라는 것을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하는 범죄라고 생각하지만, 조물주라는 존재는 인간을 위대하게 세팅하지 않았고, 따라서 낙태를 범죄라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범위 내에서 만들어진 신이라는 존재, 조물자라는 존재는 어찌보면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흙바닥에서 죽은 지렁이 사이에 때로 몰린 개미새끼들이 그 앞에서 개미들을 구경하려고 쪼그려 앉은 인간의 외모가 어떤지, 성격이 어떤지, 그 인간의 학벌이 어떤지.... 어떻게 알겠는가?


개미가 인간을 분석하려는 과정이, 인간이 신을 분석하려는 과정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만들어놓은 규칙과 규정들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며, 그것은 신의 입장에서는 별다르게 신경쓰지 않는 영역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랜덤"


사람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그냥 "랜덤" 이라고 치부하고 통계에서 빼버린다.


왜 내가 오늘 태어나야 했고, 왜 내가 갑자기 내일 교통사고를 당해야하는지...


사람들은 그냥 "재수가 없었다." 라는 표현으로 넘겨버린다.


그 원리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변수 60억 곱하기, 그 전에 존재했던 한 세대의 인류 수십억 곱하기 곱하기 곱하기 곱하기....그리고 주변 환경의 변수 곱하기....곱하기...곱하기....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너무 복잡하게 분석하고 살 필요 없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지 티격 태격 싸워가며 살 필요 없다.


복수를 일삼으며, 누군가를 짓밟으려 살 필요 없다.


286 컴퓨터로 피파 온라인3를 돌리려고 해봐야, 돌아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286 컴퓨터를 업그레이드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이 세상이 286으로 셋팅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286으로 i7으로 업그레이드 한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

286 프로세스를 신나게 개조해봐야 태생은 바뀌지 않는다.


프로세서를 바꾼다는 것은, 결국 새것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것.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새것을 어디서 가져오는가?

인간이라는 집단 외의 존재에게 받아오는가?

그 외의 존재가 신이 아니겠는가....


셋팅값을 바꿔줄 존재 말이다.


우리가 해야할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왜 우리는 286 컴퓨터가 주어졌는가..."


바로 이 질문 말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아래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286 컴퓨터로, 1억 테라바이트 짜리 프로그램을 돌리려는 인간의 도전정신에 박수를 보냅니다! 역시 인간은 위대합니다!"


물론, 1억 테라바이트 짜리 프로그램은 때려 죽여도 돌릴 수 없다.


그것이 왜 불가능하냐고?


이 세상의 세팅값 자체가 불가능하게 설정해 놓았다.

만약 그 세팅값을 바꿀 수 있다면 과학을 연구하면서, 인류의 존재 가치를 연구하는것에 동의하겠다.

 

 

그러나 세팅값을 바꾼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자체가 물리적인 존재이며,


물리적인 존재도 무한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들이 수천년, 혹은 수억년 동안 연구해 왔을 인류의 과학의 근본적인 대전제를 깨버리는 것이다.


무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이라고 가정을 할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추측해낼 수 없을정도로 무한에 가까운 수준의 대량의 전제들이 이 세상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객관적 증거로 삼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무한한지 유한한지 조차 인간은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 자체가 이미 오류를 안고 시작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절대적 논리가 아니라, 대충의 개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설을 세우고, 가설위에 공식을 만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원리들은 가설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답안지가 없기에 문제를 풀어도 답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말하는 위대한 과학의 현실이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 하는 재미있는 농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생이 참 심각한 거래..."


라는 것이 가장 재밌는 농담이라고 한다.


나는 살고 있다.


밥을 먹고 싶으면 먹고, 먹기 싫으면 먹지 않는다.


컨디션이 매우 안좋은데, 그냥 여행을 가고 싶기도 하고,

몸이 매우 안좋은데, 오늘 따라 그냥 책이 보고 싶기도 하다.


때로는 착하게 살다가도 어떤 이상한 사람을 보면 화도 나고,

커피를 마시면 몸에 안좋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자주 마신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인간이 만들어낸 법이라는 대충의 규율이, 인간의 인생을 올바르다 올바르지 않다 정의할 수 있는가?


빵한쪽 훔친 어린 아이가 법에 의해 감옥에 갔따면, 100억의 공금을 횡령한 사람이 무죄를 받은 사람의 인생과 비교하여 더 나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가?


무엇이 좋은 삶이고, 무엇이 나쁜 삶인가?


그누구도 그것을 단정지을 수 없다.


신은, 어찌보면 그런것에 신경을 안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신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불의인지 무엇으로 판단한 단 말인가?


신을 판단할 근거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세상을 신이 만들었다면 말이다.


이런 문제는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며, 인간은 위대하다." 라는 마인드를 버리기시작하면 생각보다 술술 풀려나가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은 위대하다."


라는 대전제를 바닥에 무조건 깔아버린다.


이 전제가 존재하는 한, 절대로 과학은 솔직해 질 수 없다.

아마 과학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지구에서 얼마나 미개한 수준의 존재인지 수 많은 데이터들이 입증해 주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 입증을 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하루살이 무리가 지구의 주인행세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까.

 

 

입증은 됬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란 인간의 위대함을 입증할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왜곡된 과학을 만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보다, 인간의 하찮음을 입증하는 방법은, 아마 과학적으로 훨씬 쉽다는 것은 모두가 알 것이다. 다만 핑계를 대고 있을뿐.


아니라고...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산다.


나의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사람을 사랑하며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이 세상에 규칙이 세워졌기 때문에 인류가 이렇게 발전했다고 말한다.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사람들은 법이 없으면 무법지대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사람들이 무조건 범죄를 저질르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들일까?


사람들이 만약에 법이 없다면 무조건 타인을 때리고 물건을 갈취할까?


법이 없다면, 사람들이 일은 전혀 않하고 서로 속이고 싸우기만 할까?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그 상황에 맞춰서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뿐이다.


과학이 발전해야만 인류가 행복할까?


과학이 없어도 된다.


지금의 인류가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가?


스마트폰이 있고, 최신형 컴퓨터가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있으면 있는대로 사는 것이고, 없어도 그만이다.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지배욕이 강한 사람이 있으면 지배하다가, 결국 폭동에 맞아 죽게 되는 것이고, 또 잠잠하다가 또 지배 세력이 나타나고 전쟁나고 하는 것이다.


그냥,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그냥, 사람들은 알아서 자기 살길을 살고, 자기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인생이 옳다 그르다를 같은 미생이 평가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요즘 사람들은 니 인생이 좋지 않네, 너는 죽어야 하네, 너는 왜 인생을 그렇게 사느냐 라고 질타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지 자신이 모든 규율을 정하는가?

자신이 신도 아닌데 무엇으로 그 기준을 정하고 다른 사람을 책망한단 말인가?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 그만이다.


인간의 기준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라면, 인간의 기준으로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면 그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냥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신이 신인 것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인간은 신보다 하찮은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 위대하다고 전제를 깔았따.


결국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스토리인것인가...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인간은 신이 되고 싶어하는 부류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보통 인류를 지배하는 경향이 크다.

위대하고, 더 높아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노력하고 꼭대기에서 룰을 만든다.

그리고 저 아래층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은 그 룰이 마치 진리인 것 마냥 착각한다.


그렇게 살다가, 쓰나미 한방에 모두 사라지면 그만이다.


우연이란 변수라는 존재를 측정하지 못하기에, 대충 만들어놓은 것이 우연이다.

랜덤.


인류 최고의 과학적 분석인 통계와 확률이 이 랜덤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휴지조각 같은 지식이 되고는 한다.


어쩌면 신이라는 존재는 이 세상의 룰을 대충은 정해 놓고 세부적으로는 안정해 놓았을지도 모른다.


답안지가 없다.


백날 풀어봐야, 내가 푼 해설이 답인지 알 수 없다. 내가 풀고, 내가 채점한다. 그런데, 그 문제는 4살짜리가 대학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같다.


어디에도 인간이 말하는 과학적인 환경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냥 끄적여 보았다.


난.


그냥 산다.


인생 자체를 심각하게 사느냐 마느냐 자체를 고민하지 않기로 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냥 판단하는 과정을 거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열을올리며 스트레스를 받을 생각은 없다.


싫어하면 싫어하는 것이고,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이다.


잘해주고 싶으면 잘해주는 것이고, 아니면 그냥 아닌가 보다 하는 것이다.


그냥 인생은 인생이다.


의미를 부여해서 만들어진 그런 창작품이 아니라 말이다.


인생을 통해서 배워야 할 의무도 없고,


인생을 통해서 반드시 이뤄내야할 목표나 명령도 없다.


나는 명령받아서 살고 있지 않으니까.


화려한 미사어구로 포장된 인생의 의미라는 단어 속에서,


그냥 인생은....


인생일지 모른다.


Written by Kavin

여러분의 공감하트와 댓글이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지식 경영 공장
블로그 이미지 케빈아놀드 님의 블로그
VISITOR 오늘 / 전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