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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시장이 숨진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뭐 다른 정치인들은 그렇다 쳐도, 박원순 시장은 제가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이니 이래저래 많이 접해볼 수 있었던 사람인데요.


물론 직접 말고요.


그냥 TV에서나 라디오, 인터넷방송에서 말이죠.


그런 익숙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다른 정치인들의 죽음의 소식을 접했을 때와는 또다른 기분입니다.



(이승철의 "듣고 있나요" 라는 노래를 들으며... ...)


저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박원순 시장의 사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박원순 시장이 대선 후보에 나온다?


아마 뽑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인터넷의 개돼지들 처럼 헐뜯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이 아픈 건 아닌데,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박원순 시장이 검은 모자에 백팩을 매고 집 앞을 나섰다고 하더군요.


제가 그래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마지막 결과에 이르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그랬던 적이 있어요.


모자를 쓸 때의 심정.


백팩을 둘러 맬 때의 심정.


100% 까지는 아니더라도 90% 까지는 이해 합니다.


그 때의 기분을 아마 인생에 대해서 막 꿈도 있고, 목표도 있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은 분들은 이해 못하실 겁니다.


(초라한 박원순 시장의 CCTV 속에 찍힌 모습. 외소한 체격으로 모자를 눌러쓴 채 고개를 숙이고 가는 모습이 애처롭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로 마음 먹는 단계.


그런데 모자를 쓰고 가방을 매고 밖에 나갔다는 것은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서 실행을 하는 단계 입니다.



보통 이 단계까지는 잘가지 못하세요.


이 단계가 되려면, 스스로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시켜야 하거든요.


왜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본인에게 충분히 이해를 다 시켰다는 뜻 입니다.



살고 싶은데, 죽음을 선택하는 것과,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박원순 시장의 케이스는


제가 볼 때 후자라고 보여집니다.


자신에게 죽어야 할 이유를 냉정하게 이해를 시킨 것이죠.


이게 좀 많이 슬픈 일이에요.



우울하고 씁쓸하거든요.


무엇보다도 자신이 살 가치가 없다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는 것에 대해서 쓴 웃음이 나오게 되지요.


(향년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박원순 서울시장. 서울 사람이라서 그런지, 유독 그가 남 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살아야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정당성을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상황 말이에요.


인간이 자신이 살 가치가 없다라고 느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본인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


그건 정말 슬픈 일 입니다.



"X같은 인생. 뭐 내가 떠나고 만다!"


라고 호기롭게 말하는 것 자체가 뭔가 쿨해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안에는 슬픔이 있어요.



박원순 시장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보면, 마치 그의 죽음을 매우 가벼운 선택 처럼 여기면서 댓글을 다시는 분들이 있더군요.


여러분.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가볍다고 생각하시나요?


쉬울 것 같아요?


무슨 홧김에 


"확 마!"


하면서 갑자기 목숨을 끊는다고 생각하세요?


물론 그런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매우 소수의 특이 케이스를 전체화 시키지 마세요.



목숨을 끊기 전에,


사람은 생각합니다.


자기에게 진솔해지는 시간이죠.


특히 서울 시장 까지 하는 사람은 더욱 그랬을 겁니다.



여비서의 성추행 미투가 죽음의 이유 아니냐 하는 분들도 있고,


그러면서 여비서에게 사죄하고, 죄값 다 받고 해야지 무책임하다는 말을 하시는 댓글러들도 있더군요.


(박원순과 조국. 조국은 박원순의 오른팔이었다고 한다. 조국의 라인이 문재인 라인으로 바뀌기 전까지 말이다. 사람들은 박원순이 조국에게 배신당했다고들 표현한다. )


저,,,


솔직히 무책임하다라는 반응의 글을 쓰시는 분에게 좀 한 마디 하고 싶어요.


얼마나 사람의 목숨이 하찮으면,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죠?


뭐 언론에 나와서 TV에 나와서 "저 죄송합니다!" 라고 떠들어 대야 그게 책임지는 건가요?


깜빵에서 1~2년 썪고 나오면 그게 죄값을 모두 치룬거라고 하실건가요?



삶에 대한 반성, 고찰.


죽음 직전에, 하게 됩니다.


아니, 이미 며칠전부터 하고 있었을 겁니다.


이미, 세상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희미해져요.


글을 쓰고 있어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어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건지 멍해지게 됩니다.


마치 환각 상태인 것 처럼 말이죠.


저는 느껴봤어요.

 

 


어짜피 돌아올 수 없는 길 입니다.


그러니까 고인이 된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지 맙시다.


당신들이 그렇게 장난스럽게 욕하고 비난해도 어짜피 들을 수 없는 곳으로 갔습니다.



당신들의 삶의 마지막이 얼마나 화려할지는 모르겠지만,


타인의 삶의 마감을 함부로 대하지 맙시다.


그 누구의 죽음도, 당신들이 인간이라면, 적어도 같은 인간이라면 함부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본인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몸과 아이큐 2000짜리 뇌를 가지고 태어났나요?


(시민운동가 출신, 인권 변호사 출신, 참여연대 출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만 골라서 해온 사람이다. 난 어떤 사회연대에서 경력을 키우고 자신들의 무리를 만들어서 정치에 쥐도새도 모르게 참여하는 인간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박원순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난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인에게, 혹은 무덤에 침을 뱉는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그것보다 100배는 더 싫어하는 사람이다.)


어짜피 X 같은 세상.


서로 길게 살아봐야 80년.


대단하게 살아봐야 뭘 얼마나 대단하게 살며,


가치있게 살아봐야 뭘 얼마나 가치있게 산다고,


이미 고인이 된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했어야 한다고 훈수질 하지 맙시다.


누가 보면 당신이 300세 먹은 어르신인 줄 알겠어요.



차후,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평가들은 있을 수 있겠으나, 지금 당장 고인이 된 사람에 대해서 마치 자신들의 노리개 처럼 함부로 말하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그게 멋져보이지 않으니까 뒤에서 숨어서 욕하는 것 아닌가요?


더 더럽고 치사하지 않습니까? 


유족 앞에서도 그렇게 함부로 말 할 용기 있나요?




죽음의 문턱에 서 보았던 저는,


박원순 시장이 모자를 눌러 쓰고 나갔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


마음이 아팠습니다.... ...


그 때의 심정.


그 때의 기분을 잘 알기 때문이죠.


외롭고 쓸쓸한 순간 입니다.



출구 없는 방에 갇혀 본적 있습니까.


방법이 전혀 없다고 느껴 본적 있습니까?



보통의 경우는, 해결책이 있기는 한데 그걸 할 용기가 없어서 힘들어 하죠.


사람들은 그걸 "죽을 것 같다." 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죽지 않죠.


그 때는 인생이 힘드네, 뭐 어렵네, 니 탓이네, 내 탓이네 하면서 떠들어댈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예 방법 조차 없고, 해결책이 없다면,


우리는 차분해지게 됩니다.


단념하게 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 기분을 박원순 시장도 떠나기 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냥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 성희롱 피해에 대해서 변호했던 변호사, 자칭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던 박원순 시장. 아마 그는 자신이 추구했던 가치가 자신의 잘못했을지 모르는 그 행동으로 인해서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실망감이 반성이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반성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실망, 자책 그 자체가 반성이라는 소리이다. 나는 한국식 페미니스트를 지지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반대한다. 여성가족부를 세금 먹는 기계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는 공략을 하는 대통령 후보자는 무조건 뽑을 생각인 사람이다. 그래도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그것도 서울시장이 될 정도로 나름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 대해서, 그의 과오가 있다고 해서 그의 삶을 무시하거나 조롱할 생각은 없다.)


이것 저것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사고 싶은것도,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오랫동안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이 기분 모를 겁니다.



어떤 학생이 병이 너무 심해져서 응급실에 실려왔다고 가정해보죠.


아파서 고통스럽게 환자실에 있는 그 학생에게 내일까지 조별과제 내야 하니까 니가 맡은 부분 해오라고 할 겁니까?


그 학생에게 조별과제가 보이겠어요? 학교 성적이 중요하겠어요?



살고자 하는 사람은 


"내가 죽으면 가족은 어떡해 하지."


를 생각할 여유가 있지만,


이미 죽기로 한 사람은 그것 마저 헤아릴 정신적 여유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진정 죽음 직전까지 가보았거나, 혹은 죽음을 맞이해본 적 없는 사람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박원순 시장은 고민도 많이 하고, 혹여 반성할 부분이 있다면 반성도 하고, 혹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돌아보기로 했다면 많이 돌아보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책임이니 뭐니, 생명이라는 인간 최고의 가치를 포기할 수 밖에 없던 사람에게 헛소리 그만 합시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 부모님이 늙어서 아프셔도 자기 유산은 얼마냐고 물어볼 사람입니다.


Written by Kavin.


(어렸을 적 학생시절의 박원순 사진. 어렸을 때는 머리숱도 많았고, 나이 먹었을 때의 외모보다는 훨씬 괜찮은 듯 싶다.)


사람의 생사를


마치 게임에서 캐릭터가 죽는 것 수준으로 생각하는 요즘 세대를 보며


자신의 삶의 가치, 생명의 가치도 똑같이 저렴하게 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음에 한심함을 느끼게 된다.



법이나 원칙, 책임을 망자에게 떠들어 대는 사람을 보며,


마치 자신은 영원히 이 세상을 살아갈 것 처럼 착각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법을 죽은 사람에게 적용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함께 살기 위해 세운 원칙을 이미 죽은 자에게 들이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뭐하고 있나 싶다.



우리는 모두가 인생의 아마추어이다.


인생을 두 번 살아본 경력자는 없다는 소리이다.


그래서 아마 대부분의 인생은 화려하지 않은 종말, 때로는 비참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종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들의 삶도 별것 대단한 것 없고,


또한 타인에게 존경받고 존중받는 삶도 아니면서,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함부로 남의 인생에 욕을 할 수 있는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누군가의 죽음이 내게 슬픔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즐거운 일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유쾌한 일은 아니란 소리이다.



당신들이 그리도 박원순 시장에게 책임지라고 말하는 성추행 소송 당사자인 여자 비서는


통쾌하다고 웃고 있겠는가.


정작 피해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웃지 못할 상황인데,


왜 관련도 없는 당신들은 별의 별 비난과 조롱을 일삼는가.



그 이유는,


당신들이 생명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하찮게 여기거나,


질이 안좋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생명의 의미에 대해서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


성추행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서 변호를 해준다?


그것이 과연 진심이겠는가.



이름 모를 생명의 탄생에 기쁨은 없어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 듯,


이름 모를 생명의 죽음에 슬픔은 없어도 기분이 좋지는 않아야,


그게 정상이다.


정치고 나발이고 말이다.


사람이 살아있어야 정치가 있는거지,


사람이 없는데 정치란 말 자체가 존재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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