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한참 잘 나가야했던 시절에, 난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을 방황들을 했다.


나의 적은, 어찌보면 내가 그토록 믿어왔던 존재였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심했던 존재에게 난 쓰라린 배신을 당했다.


난.


그 때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다.


(인생이란 결국 혼자 걷는 것이다. 내 판단을 타인이 조종할 수 없다. 타인은 간섭은 할 수 있지만 결정은 본인이 한다.)

(나를 위해서 살려고 하는 인간의 본성끼리 상충되기에 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법이 존재한다고 해서, 인간이 타인을 위해서 산다고고 할 수 없으며, 타인을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에 대해서 깊은 생각에 잠겨 본적 없는 사람일 것이다.)


(가령 가족을 위해 자신이 산다라고 하는 사람들 말이다. 자식을 위해 자신이 산다는 어머니 같은 사람들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돌아본적도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식을 키우는 것인데, 마치 자신이 희생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들의 부류들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매우 많다.)

 

 


나를 지탱해 주던 유일한 의지력과 인내력이 송두리째 산산조각 나버렸던 것이다.


나의 삶은 그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의 삶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괜찮은 삶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그 때 깨달았다.


"나 역시 별 수 없구나..."


그 때 부터 나는 달라졌다.


항상 분주하게 보내던 시간들이 그냥 멍하게 보내던 시간들이 되어가고는 했다.


항상 옆에 머리맡에 두었던 책들은 그 때 부터 먼지가 수북히 쌓인 진열장이 되어버렸다.


인생의 의미가 사라지는 듯 했다.


난 더 이상 주변 사람들이 알고 있던 내가 아니었다.


그 뒤로 많은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나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나의 시계는 그 때 이후로 정지해 버렸다.


나의 몸은 황폐해지고, 나의 머리는 사용되지 않아 굳어져 버렸다.


똑똑하고, 열정적이던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의미로 두는 것을 잃어버렸을 때 느끼는 그 허무함과, 배신감은 인생의 진정한 쓴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물론, 몇 번 벗어나려고, 해결해보려고 노력도 해보았다.


그러나 나는 깨달았다.


그러한 배신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그냥 배신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우연이기를 바랬다.

실수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나는 최근 몇년간, 그것이 순전히 그들의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영원히 나의 마음의 문을 열지 않기로 결정을 지었다.

그 과정은 매우 괴로운 과정이었지만,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 마음의 상처가 더 이상 그들을 무한히 안아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무식한 사람들을 싫어하냐고?


무식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니까...


생각이 있는 사람은, 잘못을 꾸짖으면 반성이라도 하는데...

생각이 없는 사람은, 말해도 알아듣지를 못하거든...

그리고 계속 그 잘못을 되풀이 하니까...


그 때 인생에서 너무 힘든 시기에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 지독하게 혼자였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다는 것은 꽤나 슬픈일이다.

가장 믿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다는 것은 꽤나 괴로운 일이다...


(언제나 함께 할 것 같은 사람들은 결국 가자의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인생은 결국 각자의 길이기 때문이다. )


난.


이제 더 이상 그 때의 내가 아니다.


또한 


난...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다....그리고 될 수도 없다.


새로운 지금의 환경에 적응을 해야겠지.


하지만 적응하지 못하겠다...


아직도 난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나 보다.


살기 위해서는 받아드려야 하는데...

난... 살기 위해서라는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난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


다만 살아볼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인생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발견을 해보고 싶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이미 내 머리 속에는 이 인생의 끝이 별 것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오늘도 내 마음 속 시계를 돌리고 있다. 


언젠가는 자동으로 멈춰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 시계가 멈춰질 때 즈음에...


난 피식 하고 웃을 것 같다.


어처구니 없는 인생.


에 대해서 말이다.


이제는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

난 이제 그 누구를 원망할 자격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난 내가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인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냥, 뇌에서 내게 너는 자격이 없다고 현실을 전달해주고 있을 뿐이다.


난.

원망할 자격이 있다.


다만 하지 않겠다.


힘든 순간.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다소 부정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스스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스스로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에 의해서도,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라...

순전히... 그냥 내가 살아보기 위해서...


난.


인생을 살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인생을 살아보고 있을 뿐이다.


이전의 나는 이미 죽었다.

아직 이전의 모습이 남아있지만, 난 더이상 그 모습을 가질 자격도 능력도 없다.

 

 

세상을 살다보면, 참 이해가 안되는 상황들이 많다.

난 왜 그 이해가 안되는 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는가....

아니...왜 이해해주려고 했는가...

난 왜 그리도 착했던가....


왜 그리도 순진했던가....


사람들은 그러하지 아니한데...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내 인생의 마지막 근처에 도달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난 눈을 뜨고 하루 하루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 지옥이다.

이 지옥의 끝을 난 걷고 있다.


나의 육신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나의 영혼은 이미 이세상에 없다.


나는 더 이상 그 때의 내가 아니다.


가끔은 그 때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휘몰아치기도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애시당초 단념했다.


(나는 나다...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도 내가 아니다. 나란 존재는 그냥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존재인 나이다.)


난 


이전의 내가 더 이상 내 본연의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도 내 본연의 내가 아니다.


진정한 나는...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 이다.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나.

사람들에게 보여졌던 나.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이렇게 조용히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이 찰나의 순간이 바로 나이다.


나의 인생이 여기서 정지한다고 해도 나는 후회는 없다.

이미 후회할 만큼 후회해 봤고, 아파할 만큼 아파해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버려진다고 해도 아프지 않다.

사람들에게 버려져봤고,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본성을 뼈져리게 느껴봤기 때문이다.


나는 이 다음 생에 새로운 세상이 있기를 빈다.

만약 없다면, 없는 것으로 족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내 인생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인간이기에,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에 나 역시 가끔 눈물나게 마음이 힘들 때가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이게 나의 운명이다.


운명이란 개척할 수 없다.

운명이란 개척할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한다.

운명은 개척하라고 존재한다는 말은, 운명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모순된 표현일 뿐이다.


나의 운명의 끝이 어디일까 궁금하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아직까지는 해피앤딩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 말이다.


난 단지 해피엔딩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다.

이 세상의 행복이란, 내가 어렸을 때 순수함 속에 배웠던 행복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순간 순간 인생 여행을 떠나며, 내 마음을 하나 하나 씩 정리하려 한다.


빠른 시간의 흐름 속에 지나쳐버린 나를 회상하며, 정리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인생은 흐른다. 이 강물의 조용하지만 거대한 흐름이 바로 운명이다.)


끝날 때 까지 끝난게 아니다.


지금의 난 내 어릴 적 좌우명으로 여겼던 이 말을 스스로 내려 놓았다.


끝날 때 끝나지 않은 경우는 1%에 해당한다.

내가 그 1%에 해당될 가능성 보다, 나머지 99% 안에 내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다.


그 99%에 포함된 사람은 운명에 좌지우지 되는 사람이며, 반대로 1%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운명을 개척한 사람이다.


1%의 운명 개척론자가 자신의 운명 개척을 나머지 99%에게 운명 개척을 가르친다면, 과연 그것이 합당한 것인가...


내가 인생을 살면서 깨달은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99%의 보편성에 중심을 두고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보편성과 편견이 깨지지 않는한 운명은 운명일 따름이다.


운명을 깨는 것이 기적이다.


인간이 이렇게 수천, 수만년 동안 존재해온 것을 기적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적인지의 여부는 비교대상이 있어야 하나, 인류에 대한 비교 대상군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으면서 항상 곁에 있는 사람들을 떠나보낸다.

그들과 이별을 한다.


그 이별을 아름다운 것 처럼 포장하지만, 결국 그 이별은 슬픔이다.

어찌보면 이 인생 속 사람들은 항상 슬픔으로 새드앤딩을 맞이하고는 한다.


단지 사람들은 희망을 찾기 위함일 뿐이다.

모든 상황이 부정적이기에 희망을 찾고, 희망이 있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생을 희망적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결국 모순이다.


단지 희망이 필요할 뿐이다.


나에게도 희망이 필요할 뿐이다. 희망이 필요하지만 난 희망을 가질 수 없으며, 희망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난 더 이상 이 세상이 선심쓰듯 제공하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싫기 때문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겠지. 그런 마음이 내 안에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그 지푸라기를 잡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나는 60억명의 인류가 살아가는 이 지구상의 60억분의 1이 아닌, 그냥 나는 나 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기에 내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 나이지, 어떤 친구의 친구도 아니며, 어떤 부모의 자식도 아니며, 어떤 나라의 나도 아니다. 그것은 환경이 만들어준 별명일 뿐이지, 그것이 본질적인 나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희망을 뺏어간다는 것, 사람에게서 꿈을 뺏어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과 같다는 말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이세상은 모든 것이 부정적일 따름이다.


난 지금, 희망을 가질 수 없음을 알며, 그 없는 희망 속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의미를 찾고 있다.

희망이 없다는 것, 꿈꿀 수 없다는 것.

그것 없이 내가 이 세상을 버틸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기 위한 여행이다.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다.


다만, 나는 인생이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뿐이다.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행복하지 않은 인생은 모두 무의미 하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하루에 반나절 이상 보내는 회사 생활에서는 왜 행복하지 않은 모습으로 인생을 소비하는가.

그 순간은 가치가 없는가?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불행한 시간을 보낸다?

 

 

아니다.


난 적어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불행하던, 행복하던 그것은 인생의 본질이 아니다.


인생의 본질은 내가 불행 속에서, 그리고 행복속에서 무엇을 느끼느냐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을 배우고 깨닫느냐 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

그래서 배우지 않는다.

행복하지 않으면 화를 낸다.

그래서 배우지 않는다. 


난 행복하지 않다.

그러나 배우고 반성한다.


난 단지, 그 배움과 반성의 끝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고 싶은 것 뿐이다.

하루 하루 의미 없는 시간일지 모르겠지만 모든 시간은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순간 순간이 쓰레기 같을 수는 있지만, 그 쓰레기 같은 시간들도 결국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찾고 싶은 것 뿐이다.


왜냐하면...


난 그 의미 없이 더 이상 이 인생의 길 위에서 그대로 서 있기 힘들기 때문이다.


달려갈 수 없는 양쪽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힘내서 일어서서 걸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억지일 뿐이다.

인생은 혼자 걷는 것이다.

인생을 누군가가 함께 시작해주고, 함께 마무리 하지 않는다.

인생은 결국 혼자만의 경주이다.


양쪽 다리를 쓸 수 없다면, 적어도 그 경주의 시간이 완료될 때 까지, 그 자리에서 쓰러진채 그 시간을 조용히 보낼 수 있는 의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게 필요한 것은 그것일 뿐이다.


힘을 내면 걸을 수 있다는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1%의 기적을 바라는 인생보다, 99%의 평범함 속에서 지금의 나를 인정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을 뿐이다.


사람들은 인생을 함께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생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할수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인생을 함께 한다 할 수 있겠는가?


잠시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인생과 협조하는 것일뿐.

그들이 자신이 뒤쳐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듬어주거나 도와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일뿐.

타인의 인생을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생은 혼자이기 때문이다.


홀로 걷는 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말이다.


가족도 마찬가지이고, 친구도, 연인도,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을 위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위해 상대방이 존재할 뿐이다.


내 마음은 나의 것이고, 타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내 심장은 나의 것이고, 타인이 대신 심장을 뛰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디로 떠나볼까?


기억이 머무르는 곳...


난 별로 다녀본 곳이 없어서...


From Kavin


지식 경영 공장
블로그 이미지 케빈아놀드 님의 블로그
VISITOR 오늘 / 전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