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난 지금 이순간이 좋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음악과 커피, 그리고 가을과 겨울이다.

 

약간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커피를 한잔 타서 살짝 으스스한 추위를 느끼며 마시는 그 순간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조용한 시간이다.

 

난 그 시간을 사랑한다.

 

요즘은 새로운 시간이 생겼다.

 

스타벅스에 와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글을 적는 이 순간이 또한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난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이 순간이 좋다.

 

세상에 나만 있는 것 같은 기분.

세상에서 나만 조용한 공간에서 쉬고 있는 기분이다.

 

사람들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행복감을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혼자 일때 가장 행복함을 느낀다.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되었다.

 

나도 어릴적에는 함께 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나이가 커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사람들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이 세상사람들이, 내가 생각하고 추측했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사람들이 무섭다. 무서워졌다.

사람을 무서워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들 한다.

난 겁장이가 아니다.

그래. 무섭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그렇다면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그래...

난 사람들이 싫은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사람아닌가.

그렇다면 나 자신도 싫은가.

 

그래.

나는 내 자신도 싫다.

 

 

 

내가 인간이기에 느끼는 수 많은 감정들의 모순이 싫다.

이익을 추구하는 얍삽한 마음과 정의로운 척 연기하는 내 모습도 싫다.

 

어느 순간 부터 세상은, 이러한 모습들이

 

"인간으로 당연한 것이며 전혀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라고 가르친다. 세상이 변해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이며,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에 그 어떤 핑계를 붙힌다고 해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이 원래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어릴적 시절은 나름 행복했고 따스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에 좋지 않은 친구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내가 만난 질이 나쁘다고 평가 받던 친구들은, 인간적인 대화라는 것을 통해서 그 관계를 풀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정의를 외치며, 선의를 외치는 어른들이다.

그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자신만의 핑계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돌려 세우는 것은 쉽지 않다.

 

바뀔 수도 있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난, 변하기 쉽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을 싫어한다.

어짜피 그들과의 대화의 결론은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이해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세상을 썪어가게 만들고 있지만, 그것이 정의라고 표현한다.

 

"세상이 원래 이래."

 

라는 말을 나는 싫어한다.

모든 것을 간단한 단어 하나로 단정 지어버리고, 그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 태도가 싫다.

 

그래서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혼자가 되면, 그런것들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사람들의 눈을 보면 느낄 수 있다.

 

사랑스러운 사람.

화가 난 사람.

세상에 분노가 많은 사람.

열등감에 빠져 있는 사람.

여유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

 

난 어릴적부터 느낄 수 있었다. 내 눈과 마주쳤던 그 수 많은 사람들의 눈을 보면, 세상은 그리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 혼자 있을 때 아름답다.

나는 나 혼자 있을 때 가장 멋지고 행복하다.

 

그래서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난 지금 블로그에 글을 적는 지금 이순간이 좋다.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잔잔한 피아노 노래를 들으며 글을 적노라면,

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카페에서도 나만의 공간을 찾게 된다.

나를 방해하는 엄청나게 큰 소음만 없으면 말이다.

 

스쳐가는 잡음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의 생각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내 모습을 이상하다고 치부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은, 세상과 맞지 않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해버린다.

 

그것이 바로 다수의 원칙일 것이다.

 

그러나 난 이제 지쳤다.

세상과 맞는 척 연기하며 살고 싶지 않다.

싫은 것은 싫다.

좋은 것은 좋다고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좋지 않은 것을 강제로 좋은 것이라고 받아드리며 살고 싶지 않다.

그나마 짧은 내 수명을 단축시키는 일이다.

 

나의 삶은 누군가가 공짜로 준 것이지만, 그 삶을 준 존재는 세상이 아니다.

내가 나의 삶에 대해서 이 세상의 기준에 맞춰 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도 "나" 이다.

이 세상 속의 내가 아니라,

그냥 나 말이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이 좋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비생산적인 시간일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것을 고려하며 산다면,

난.

더 이상 살지 못할 것 같으니까.

난 지쳤다. 이제 세상의 비위에 맞쳐주며 살 수 있는 힘이 없다.

그것을 용기가 없다고 치부하는 세상에게 내가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돌아오는 답은 같다.

 

한낱 푸념에 가깝다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생각하던 말던 상관없다.

인간이기에 신경쓰이고 괴로울 때도 있지만,

이제는, 옳지 않은 것을 옳다고 가르치는 세상에 휩싸여 살아가고 싶지 않다.

내가 앓아온 마음의 병이 더더욱 커지면,

더 이상 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힐링 타임이 좋다.

세상과 단절된 시간 말이다.

이어폰으로 세상을 단절시키는 이 시간.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커피숍에서마저 분주하게 컴퓨터로 공부를 해대는 젊은 청년들의 경쟁적인 눈빛속에서

난 오히려 슬픔을 느낀다.

 

난. 커피를 마시며 글을 적는다.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세상에서의 슬픔의 뜻은,

내가 슬픈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이런 것은 슬프다라고 정의한 것들에 대해서만

슬픔이라고 하는 것이다.

 

진정한 슬픔을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것을 슬픔이라고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당신을 슬프게 바라보더라도,

네가 행복하면

그것이 행복이다.

 

여러분의 공감 클릭과 댓글이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지식 경영 공장
블로그 이미지 케빈아놀드 님의 블로그
VISITOR 오늘 / 전체